피아노(The Piano, 1993)

  •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 감독 : 제인 캠피온
  • 출연 : 홀리 헌터(에이다 맥그레스 역), 하비 케이틀(조지 베인스 역), 샘 닐(앨릿데어 스튜어트 역), 안나 파킨(플로라 맥그레스 역)

 

오늘은 제인 캠피온 감독의 명작 영화 '피아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말 아름답고 여운이 오래가는 영화였습니다.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어요. 화면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비 오는 날 우중충한 무채색 화면에 플로라가 입고 있던 빨간 망토가 아주 도드라지더군요.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도 참 인상적이었고요, 스토리도 재미있었습니다.

 

19세기말, 미혼모 '에이다'는 자신의 딸 '폴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낯선 땅 뉴질랜드에 도착합니다. 그녀는 여섯 살 이후 말하기를 거부하고, 유일하게 딸과 피아노와만 소통을 합니다.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남편 스튜어트는 피아노를 해변가에 버리고 갑니다. 남편에게 피아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베인스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베인스를 거부하던 에이다, 결국 둘이 사랑하게 됩니다.

 

[등장인물 간단 소개]

  • 언어 장애를 가진 에이다(홀리 헌터)
  • 그녀의 딸 플로라(안나 파킨)
  •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샘 닐)
  • 에이다를 사랑하고, 나중에는 서로 사랑하게 된 베인즈(하비 키델) 

 

에이다의 피아노

말을 하지 못하는 에이다는 베인즈에게 글을 써서 피아노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인즈는 글을 못 읽는다고 하지요. 에이다는 말을 못 하고, 베인즈는 글을 못 읽는다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말과 글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인데 그 둘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하는군요.

 

그러나 말과 글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말과 글로 소통할 수 없다면 몸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몸으로 소통할 것이란 걸 극 초반에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마음이 없으면 몸으로 소통하는 것 또한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결국 둘은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소통합니다.

 

바닷가에서 에이다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도 참 아름답습니다. 여태까지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피어납니다. 얼음이 녹듯 그녀의 얼굴이 스르르 녹는 장면에서 제 가슴도 스르르 녹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아노 소리에 맞춰 두 손에 해초를 쥐고 춤을 추는 딸 플로라의 모습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저는 이 장면부터 플로라가 에이다의 분신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유롭게 춤을 추며 재주넘기를 하는 플로라는 에이다의 영혼인 거죠. 에이다의 수화를 통역해 주는 사람도 플로라입니다. 플로라의 입을 통해서 에이다는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어요. 저는 이 장면을 홀린 듯 보았습니다. 

 

푸른 수염 연극의 의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연극 장면에도 복선을 깔아 놓았더군요. 연극은 푸른 수염이라는 동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동화의 원작은 참 무시무시합니다. 푸른 수염이라는 사람은 사냥을 나가면서 다른 남자가 범할 수 없도록 아내에게 정조대를 채웁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열쇠를 주면서 다른 방은 다 열어도 되지만 한 방 만은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 하지요. 아내는 여차저차 한 과정을 거쳐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하고 열어보지 말라는 방을 열어봅니다.

 

그 방에는 푸른 수염의 전 아내들의 시체가 걸려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했던 연극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지요. 푸른 수염의 죽은 아내들이 벽에 줄줄이 걸려있고 방의 문을 열었다는 걸 안 푸른 수염이 도끼로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는 장면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의 교훈은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라 하는 것이지만 원작 동화는 여성을 비하하고 있어요. 영화의 시대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남편인 스튜어트가 둘의 관계를 알고서, 에이다가 나오지 못하도록 집 밖에서 빗장을 지르고 나무를 덧대어 못질하는 장면은 마치 푸른 수염이 자신의 아내에게 정조대를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동화에 영화를 대입시켜서 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습니다.

 

 

마침내 사랑하다

에이다의 집으로 보내진 피아노 에이다가 한 손으로 그 피아노를 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장면도 강하게 꽂히더군요. 거래가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 전까지는 베인즈와의 관계가 거래였습니다. 검은건반을 칠 때마다 네 몸을 만지겠다는. 에이다는 그 거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피아노를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요. 에이다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굴욕적인 거래였습니다. 그랬기에 연극 관람을 할 때 베인즈가 그녀의 옆 자리에 앉으려 하자 못 앉게 하지요. 그리고 남편인 스튜어트가 에이다의 손을 잡는 걸 보고 베인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에이다는 아주 묘하게 웃습니다. 내가 이겼지? 하는 듯한 표정이었어요.

 

그런데 자신의 집으로 온 피아노를 치면서 비로소 베인즈의 사랑을 인식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자신이 피아노를 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소유에 있습니다. 땅을 소유하고 여자를 소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요. 베인즈와의 찐한 사랑씬이 등장할 때까지도 남편과의 사랑씬이 없어 좀 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녀의 남편이 성불구라는 걸 암시하더군요.

 

그녀의 남편은 에이다를 소유하려고만 한 것이지요. 에이다가 피아노를 치면서 주위를 둘러봐도 남편은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못 듣습니다. 이 장면에서 에이다는 깨닫지요. 자신의 전부인 피아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남자, 비록 일자무식한 남자이지만 자신 또한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걸.

 

딸 플로라가 자신의 아빠 얘기를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사실과 꾸며낸 이야기를 버무려서 진짜처럼 맹랑하게 얘기하는 걸 볼 때는 에이다 자신이 꿈꾸던 것을 저렇게 표출하는구나 싶었고요. 베인즈와 사랑을 나누고 집에 와서 깔깔 웃는 모습도 선명한 한 장면으로 남습니다. 영화 내내 흐르던 피아노 소리와 아름다운 영상은 또 어떻고요? 암튼 가슴에 남는 영화를 잘 보았습니다.